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조지 워싱턴 (문단 편집) === 사망 === 워싱턴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난지 2년만인 1799년 12월 14일에 사망했다. 워싱턴의 공식 사인은 '[[과다출혈]]'이다. 워싱턴은 눈 내리는 날 무리하게 말을 타고 산책하다가 폐렴과 후두개염에 걸렸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무리하다고 생각될 만큼 많은 피를 뽑았다.[* 당시 서양에서는 그때까지도 병이 나면 무작정 피를 뽑는 '방혈치료'가 유행했다. 현대인이라면 이런 치료법이 황당해 보이겠지만, 그 시대에는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체내 혈액의 불균형이 각종 질병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거나 병으로 더러워진 피를 빼내고 깨끗한 새 피가 만들어지면 낫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이런 잘못된 처방으로 인해 과다출혈로 사망하는 사례가 많았다.] 결국 5파인트(약 2.35리터)나 되는 피를 뽑은 워싱턴은 폐렴에 걸린 지 3일만에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90년대만 해도 위인전에서는 겨울에 웬 비가 내려서 산책나간 워싱턴이 비를 잔뜩 맞고 [[폐렴]]에 걸려 죽었다고 나오기도 했었다. 워싱턴의 사후 원래는 미망인 마사의 제안에 따라 [[워싱턴 D.C.]]의 [[미국 국회의사당|국회의사당]]에 영묘를 만들어 워싱턴의 [[관(장례)|관]]을 안치하려고 했으나, 고인의 의사에 따라 유해는 생전에 개인 영지인 마운트 버넌에 만들어놓은 가족 선영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워싱턴이 안장될 당시까지만 해도 마운트 버넌의 선영은 관리가 매우 부실한 상황이었고, 워싱턴은 마운트 버넌에 안장되길 바라면서 무덤을 새로 더 크게 개축하길 바랐지만 이 유언은 집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1830년 마운트 버넌에서 일하다 해고당한 후 앙심을 품은 정원사가 워싱턴의 유골을 훔치려고 시도한 사건이 터지면서 워싱턴의 무덤을 새로 만들어야 된다는 의견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에 [[미영전쟁]] 당시에 불타버린 국회의사당을 재건하면서 국회의사당 지하에 새로이 워싱턴의 묘실을 만들어 그곳으로 이장하자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당시 남부 출신 의원들의 반발로 인해 흐지부지되었고, 결국 워싱턴은 1837년 마운트 버넌에 새로 만든 무덤에 부인 마사 그리고 다른 워싱턴 가문의 구성원들과 함께 안장되었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이 국회 의사당 지하에 마련된 묘실을 이용하지 않자 이후 어느 누구도 이 자리를 이용할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고, 현재도 이곳은 "워싱턴을 안장하려 했던 자리"로 팻말만 붙어 있고 비어있는 상태다.[* 때문인지 미국 대통령들도 사망하면 보통은 자기 고향이나 살던 곳에 묻히는 경우가 많다.] 훗날 [[남북전쟁]]이 터졌을 때 워싱턴의 연고지였던 버지니아주가 미합중국을 탈퇴하고 [[남부연합]]에 가담했기 때문에 마운트 버넌은 물론 그곳에 있는 워싱턴의 무덤까지 졸지에 남부연합에 속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마운트 버넌에서 북쪽으로 겨우 20km만 가면 북부의 수도 워싱턴 D.C.가 나오는 데다가 포토맥 강만 건너면 바로 북부 메릴랜드주인 최전방이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파괴될 위험에 처하기도 했으나 워싱턴은 남과 북을 가리지 않고 존경받는 영웅이었기 때문에 양측은 암묵적으로 마운트 버넌을 중립 지역으로 정하고 그곳에서의 교전을 피했다.[* 때문에 근방에 배치된 남군과 북군 병사들은 때때로 무기를 내려놓고 마운트 버넌을 방문하기도 했다.] 때문에 남부의 수많은 농장이 전쟁으로 파괴되는 와중에 농장은 물론 워싱턴의 무덤 역시 무사할 수 있었다. 마운트 버넌에 있는 워싱턴의 무덤[[https://www.youtube.com/watch?v=pK0NuLLS_cw|영상]] 아내 마사 워싱턴과 합장되어 모셔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